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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뒷모습∨안규철

이름없는 꽃 2022. 12. 13. 21:05

[형태와 형태가 아닌 것] p11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덩어리 속에 숨어 있는 조각상의 형태를 보아내는

남다른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다른 조각가들이 거들떠보지 않았던 돌덩이 속에서

골리앗에 맞선 영웅적인 청년 다비드의 모습을 보았고 그 형상을 살아 숨 쉬는 듯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조각가란 돌 속에 갇혀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사람이었다.

사물의 표피를 꿰뚫는 그의 통찰력과, 그렇게 그가 남긴 수많은 걸작들을 펌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나는 문득 그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망치와 정으로 깨어낸 파편과 가루들이 궁금하다.

귓전을 울리던 그 무수한 망치질의 소음과, 잘게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지고 바닥에 쌓이던

대리석의 파편과, 땀에 젖은 그의 온몸과 작업장을 하얗게 뒤덮었을 두터운 먼지를 생각해본다.

여기서 세계는 형태와 형태가 아닌 것, 남는 것과 버려지는 것으로 나뉜다.

작품을 만드는 일은 기억될 것과 잊힐 것을 구분하고 그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었다.

 

미켈란젤로와 그의 후배들이 세상의 모든 대리석 속에 숨어있는 형태들을 끌어낸

지금 우리는 결국 그 잔해들 속에서, 버려진 파편과 먼지 속에 숨어 있는 형태를 찾고있다.

 

[그릇들] p19

 

그릇들은 과묵한 편이다. 그것들은 원래 소리를 내라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악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악기처럼 소리를 낼 수 있다.

들릴 듯 말듯한 미세한 속삭임으로부터 뼛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고음까지

제법 다채로운 음역을 구사할 줄 안다.

음식을 담기 위해 비어있는 그릇의 내부와, 음악을 담기위해 비어있는 악기의 내부는 비어있다는 점에서 같다.

그것들은 외부의 자극과 충격에 반응하는 점에서 같다.

그들의 공통된 미덕은 침묵이지만 그 침묵은 언제라도 중단될 수 있는 침묵이다.

그 속에는 언제라도 새어 나올 수 있는 한숨소리와 중얼거림과, 감탄사와 재잘거림이 들어있다.

거기에는 또한 그릇이 깨질 때 마지막으로 내뱉게 될 짧고 강렬한 탄식이 들어 있다.

모든 그릇들에는 작은 세계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어 있다.

그릇을 만들 때 우리는 그 소리들도 같이 만든다.

또는 우리가 그릇을 만드는 동안 그릇은 그 소리들을 만든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무겁게 가라앉은 식탁의 침묵 속에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도 끼어든다.

이제 막 돌아서서 헤어지는 연인들 사이에 마침표를 찍듯이 '딸깍' 찻잔 내려놓는 소리로 끼어든다.

그것들은 절대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지만 모든 것에 반응한다.

무관심에는 무관심으로, 분노에는 분노로, 슬픔에는 슬픔으로 응답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릇으로 사용하지만 그것들은 자신들이 악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릇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악기의 삶을 사는 것은 그들의 일이다.

 

 

[겉과 속] p47

 

고장 난 기계는 뜯어서 속을 들여다보아야 고칠 수 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겉에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계를 감싸고 있는 케이스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밖에서 알 수 없게 한다.

사용자는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필요가 없다.

이른바 '사용자 중심'의 '직관적 디자인' 덕분에 사용법을 따로 배울 필요도 없다.

전원을 연결하고 스위치를 누르면 나머지는 똑똑한 기계가 다 알아서 한다.

우리는 결과만 소비하고 과정은 기계에게 맡긴다.

이 편리한 분업은 기계가 고장 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계가 멈추거나 오작동을 시작하면, 그동안 스위치만 누르던 손가락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힘들여 기계를 뜯어봐도 암호처럼 복잡한 회로판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요즘 기계들에는 임의로 분해하지 말라는 경고문까지 붙어 있다.

우리는 일상의 경계를 넘어서 기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권한이 없다.

전문가를 부르면 부품을 통째로 갈거나 기계 자체를 새것으로 바꾸라고 한다.

결국 고장 난 기계를 내다버리고 새것을 들여놓는다.

우리는 이 기계들의 주인이지만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물론 기계들도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걱정거리들에 아무 관심이 없다.

이런 관계가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한다.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사물의 겉에만 관심이 있고 그 내부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장 난 것이 냉장고나 세탁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일 때,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일때,

우리의 운명을 규정하는 제도 자체일 때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관성] p59

 

바위는 웬만해선 제자리에서 꿈쩍하지 않는다.

흐르는 물은 웬만해선 멈추지 않는다. 바위는 머물기를 원하고, 물은 흘러가기를 원한다.

바위도 물도 지금의 상태가 이대로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우리는 사물의 관성이라고 부른다.

관성 뒤에는 중력이 있다. 사물의 관성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중력을 설득해야 하고, 사물이 갖고있는

질량이나 운동량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다. 흐르는 물을 막으려면 거대한 콘크리트댐이 필요하고,

바위를 옮기려면 바위보다 훨씬 더 무거운 크레인이 필요하다.

일상의 사소한 습관도,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시대의 흐름도 바위와 물처럼 관성의 지배를 받는다.

세계를 그 관성으로부터 떼어내 옮기고 변화시키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면,

그 일의 성패는 우리에게 그 관성을 능가하는 더 큰 힘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나를 지배하는 관성은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이름으로 내 안에 들어앉은 타성과 편견의 바위들을 끌어내고, 익숙한 방향으로만 흐르려는

생각의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릴 힘이 나에게 있는가.

 

[나무에게 배워야 할 것] p79

 

뒷마당의 느티나무에서는 여름내 마른 가지들이 떨어졌다.

한 뼘도 채 안 되는 잔가지들이지만 여러 가닥으로 뻗어나간 제법 굵은 것들도 더러 있었다.

잎사귀가 없고 바짝 마른 이것들은 강풍에 꺾이거나 극성스러운 새들의 날갯짓때문에 부러진 것이 아니다.

나무가 스스로 떨어뜨린 것이다.

어떤 가지는 살리고 어떤 가지는 버릴지를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이 나무의 일이다.

자기 몸에서 자라는 가지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지켜보다가 어떤 것들을 스스로 잘라내는 것이다.

이 일을 게을리하면 가지들이 한쪽으로 치우쳐 자랄 것이고, 결국 나무는 언젠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게 될 것이다.

저마다 햇빛이 잘 드는 곳을 먼저 차지해 더 많은 잎사귀를 내려고 경쟁하는 가지들의 다툼을 중재하고

방향을 조정하고 잘못된 것은 미련 없이 쳐낸다.

그렇게 나무는 줄기를 중심으로 균형을 이룬다.

나에게도 나무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가지들이 있다.

그것들 중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하고 잘라낼 것과 살릴 것을 정해야 한다.

생각처럼 잘되지는 않지만, 나는 끈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버릴 것을 버리는 나무의 결단을 배워야 한다.

나무가 된다는 것은 한곳에 자리 잡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나무의 미덕은 인내와 여유로움만이 아니다.

치열한 자기성찰과 말 없는 신천에 나무의 미덕이 있다.

11월, 지난여름 뜨거운 햇볕과 비바람 속에서 함께 부대끼던 앞사귀들을 보내는 시간이다.

마당의 낙엽을 쓸며 이처럼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법을 나무에게 배우는 시간이다.

 

[살아지다] p83

 

오래전 누군가가 '살아지더라'고 말했을 때, 내게는 그 말이 '사라지더라'로 들렸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이 한동안 실제로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들렸을지 모른다.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살게 되더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냥, 그저 그렇게, 조용히, 그날그날, 회한과 그리움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다가오는 시간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서 등등의 수식어가 붙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 말, '살아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의례적이지만 반가운 인사를 건넨 나에게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온 이 짧은 대답 속에는 질문하는 사람을 밀어내는 단호한 거부가 들어있었다.

괜찮다는 말, 어쩔 수 없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는 말, 그래서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니

어설픈 위로따위를 듣지 않겠다는 말.

'살다' '살아오다' '살아가다' '살아내다' '살아남다'가 아니라,

'살아버리'고, '살아치우'고, '살아없애'는 삶, 그래서 결국 삶 속에서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그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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