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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백수린

이름없는 꽃 2023. 1. 6. 00:34

 

가산마리오점 영풍문고 방문,

층 전체가 서점이고, 카페와 독서할 수 있는공간을 많이 마련해두어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이지 않나 싶다.


 

백수린 작가  '여름의 빌라' 를 읽으러 서점에 왔다.

 

차례

 

- 시간의 궤적

- 여름의 빌라

- 고요한 사건

- 폭설

-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 흑설탕 캔디

- 아주 잠깐 동안에

-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 나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서

 

독서후, 각 주제별로 리마인드하고싶은 글을 뽑아보았다.

 

 

시간의 궤적 中 p18

 

언니의 마음, 견고하지만 연약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하며, 누구에게도 속박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갈망하던 언니의 마음속 모순들은

빛과 어둠처럼 일렁이며 언니를 특별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안주를 지향하지만 탈주를 동경하고, 고독을 좋아하지만 타인과의 결합을 원하는

나의 모든 면을 언니가 알고 있듯이.

 

여름의 빌라 中 p44

 

긴 여행 끝의 피로가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지만, 아마도 그때 나는

처음 홀로 긴 여행을 떠나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충만감, 달콤한 자유로움,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에 취해 있었던 것 같아요.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와 문화마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다른 한 면마저 결코 넘을 수 없는 휴전선으로 차단된

작은 반도 출신인 내게 당신들과 함께 보냈던 며칠의 시간은

내가 세계시민으로 거듭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던 거죠.

 

그때 우리가 헤어졌던 새벽 여섯시 오십오분의 베를린 동역에도

일상의 고단함을 견디며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그 당시의 내게 그곳은 낯선 장소로 나를 이끌어줄 설렘과 모험의 시작점처럼만 느껴졌으니까요.

 

고요한 사건中 p104

 

마른눈.자국눈.가랑눈. 국어사전에서 내가 발견했던 무수한 단어로도 형용하기가 충분치 않던 눈송이.

그토록 숨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다.

구겨진 신발 위에, 양말도 없이, 까치발을 한 채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 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그때 나는 창밖으로 떨어져내리는

아름다운 눈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폭설中 p137

 

하지만 그 밤 그 도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아직 어두웠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간신히 의지해 달리는 암흑 저 멀리로 여우와 사슴 따위가 겁도 없이 자꾸

도로 위로 뛰어들었으므로 그녀는 운전하는 내내 두려웠다.

혹시 그녀의 부주의로 여린 짐승을 치기라도 할까봐.

그날 밤, 눈에 빠진 차 안에서 엄마에게 퍼부었던 말들 대신 오래전 학원 갔다 오는 길,

엄마와 케빈이 함께 있는 것을 처음 봤던 날에 대해 말했더라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녀는 가끔 생각했다.

그녀가 엿봤던, 그날 밤의 그녀보다 겨우 네댓 살 더 많았을 뿐이었던 엄마의 얼굴, 사랑에 빠져버린 그 여자의

얼굴이 실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해서 말했더라면. 하지만 그 밤 그녀는 끝내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녀가 엄마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들을 그에게 처음으로 터어 놓은 것은 상서로운 눈이 내린다던 소설의 밤이었다.

그 밤, 열한 시간의 진통 끝에 아이를 낳은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호르몬때문에 한번 시작한 이야기를 멈출 수 없었다.

농밀한 어둠 속에서 그의 옆얼굴 윤곽이 간신히 보였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됐어?"

긴 시간 동안 그녀 옆에 누워 이야기를 듣던 그가 그녀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녀는 그것에 대한 답을 말하라는 대신 그저, 우리는 침묵 속에서 어둠의 도로를 달릴 뿐이었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드문드문 불빛이 켜진 인가가 있는 곳으로 마침내 접어들었을 때, 두껍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고도.

"짐승을 한 마리도 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우린 참 운이 좋구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p 152

 

그녀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지금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기보다는

인생의 단계 단계에 걸맞는 역할을 수용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p 162

 

집의 곳곳은 철근이 드러나 있었고, 절반 이상 허물어진 담벼락에는 낡고 더러운 천이 매달려 있었으며,

모든 것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황폐해진 집은 5월의 빛 속에서 군더더기가 생략된 무대처럼 아름다웠다.

휴식시간인지, 사방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가림막이 쳐져 있지 않은 대문이 있던 자리는 마치 누군가가 읽고 펼쳐둔 초대장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흑설탕 캔디 

 

그럼에도 이런 겨울 오후에, 각설탕을 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리면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각설탕 탑을 쌓는 일에 아이처럼 열중하는 늙은 남자의 정수리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아른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할머니는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인생에 무언가를 기대한다니.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그렇게 평생 동안 배신을 당해놓고도. 젊음을 다 바쳐 아이들을 길러봤자, 딸들은 평생 아들들만

끼고도는 엄마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돌아가며 말을 했고, 아들들은 누나들보다 잘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엄마 앞에서 평생 주눅이 들었다고 술만 마시면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어차피 우리집 남자들이 숨쉬는 방식까지도 못마땅하잖아요!" 언젠가는 손주들 또한 빚쟁이처럼 당당하게 비난해오겠지.

 

그런 상념에 빠져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지금은 브뤼니에 씨가 여기에 있고, 할머니는 그와의 사이에 무언가, 

공감이라든지 이해, 생의 가장자리로 떠밀려온 사람들 사이의 연약한 연대나 우정 같은 것이 존대한다고 믿고 있지만,

브뤼니에 씨는 할머니와의 시간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 동안에

 

풍경은 언제 감각의 형태로 사람의 기억 속에 남는 걸까.

이끼 냄새가 나는 반지하의 방에 홀로 요를 깔고 누워 있다가도 그는 취기가 오르면 그런 것이 궁금했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선주는 나를 좋아해주었고 나 역시 선주를 정말 좋아했다.

하지만 선주에게 나의 모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같은 만화책을 읽었고, 언제나 주인공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흑발과 금발의 남자 인물중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열 올리며 대화를 나눴지만, 언젠가 나는 선주와 내가 아주 깊은 곳에선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

다미는 나에게 뭔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던 걸까?

그러니까, 학교 안에선 자신보다 성적이 월등히 뛰어나 교사들의 칭찬을 받는 나에게.

우리는 누구든 이 세계에 자신의 효용을 확인할 때 비로소 존재하는 법이니까,

-

술을 마신 탓인지 남자아이의 입술은 탐스럽게 빨갛고 윤기가 흘렀다.

그 남자아이를 좋아했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른 후, 나의 연인이 되었던 남자들은 조금도 그 남자아이와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겐 그와 사귈 마음이 조금도 없는데

그가 나를 온몸으로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로 속한 세계가 다르므로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으리라는

사실이 나를 자극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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